[특파원 칼럼/배극인]일본이 한국을 따돌린다면 우리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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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설마설마했는데 역시나 강행하고 말았다.”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에서 한국과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데 대한 일본의 한 한반도 전문가 얘기다.

일본 내 한반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무성은 올해 초 문구를 삭제할지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아무런 실익이 없는데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강행한 것이다.

이에 한국이 너무 과민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다. 일본의 중견 언론인은 “별로 신경 쓸 것 없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판결부터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기소까지 한국에 대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누적된 불만이 반영된 것으로 일종의 ‘투정’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부부 사이에도 말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다 싸우는 게 건강한 관계일 수 있듯이 한일 관계도 기본적인 신뢰가 있으니 일본이 화를 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사안을 그냥 넘기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적지 않다.

우선 가장 거슬리는 대목은 이번 사건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연대에서 한국을 따돌리려는 의도가 읽힌다는 점이다. 즉,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를 견제하며 한일 관계 회복을 촉구하는 미국을 향해 “한국은 애초부터 가치관이 달라 얘기가 안 된다”며 한마디로 한국을 왕따시키려는 전략이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한중일 과거사 논쟁이 실망스럽다”는 발언을 한 직후에 외무성이 홈페이지 수정을 했다는 점도 전략적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아베 총리는 다음 달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와 언론은 작년부터 전통적 한미일 3각 체제에서 노골적으로 한국을 제외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일본과 미국, 호주 등 3국 정상회의가 열리자 일본 신문은 ‘앞으로 한국은 빼고 일미호 3국 공조로 중국을 견제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시정 연설에서는 미국은 물론이고 호주, 아세안, 인도, 유럽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과 법의 지배라는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며 두터운 우정을 표시했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라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갔다.

일본의 ‘한국 따돌리기’ 배경에는 역사 문제와 별도로 중국에 대한 시각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3개월간 일본 주요 대학에서 강의한 정재정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일본 학자들에게서 “한국은 중국이란 뱀에게 먹혀가는 개구리로 보인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전했다.

일본이 중국을 뱀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은 청일전쟁에서 난징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지은 역사의 업보 때문일지 모른다. 중국이 언젠가 복수할지 모른다는 잠재적인 공포가 어깨를 누르고 있는 가운데 2010년 처음 일본을 추월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불과 4년 만인 지난해 일본의 갑절로 늘었다.

문제는 한국이라고 해서 청일전쟁 이후 120년 만에 대규모 세력 변화가 진행되는 동북아의 정치 지형을 팔짱 끼고 볼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광복 이후 한미일 3각 체제 속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고 중국에 대등한 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중국을 포함해 주변 국가와의 거리를 몇 미터로 다시 설정하느냐가 민족의 존엄과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50년, 100년 후를 내다보는 외교 청사진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길이 나타났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지도가 잘 안 보여서 하는 말이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아베 신조#한국#왕따#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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