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늙은 루저의 ‘개량한복 입은 테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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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은 “미국 테러했다” 주장… 야당 좌파는 “테러 아니다” 격하
정치권의 동지애 적선 덕에 집회마다 늙은 루저 먹고살고
때맞춘 ‘외로운 늑대’ 테러 덕에 박근혜 정부 유일한 업적으로
‘종북세력 척결’ 기록될 판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본인은 테러를 감행했다는데 옆에서 그거 테러 아니거든, 하고 한사코 격하(格下)하는 건 황당한 일이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과도(라지만 25cm 길이면 거의 식칼)로 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를 둘러싸고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경찰에 붙잡혀 가면서도 “오늘 테러했다” “전쟁 반대”라고 외쳤다. 경찰서에 들어갈 때까지 “왜 지난달에 이산가족 상봉을 안 했느냐. 군사연습 때문 아니냐. … 내가 미국을 칼로 베었다…”라며 테러의 목적과 정당성을 밝혔다. 핵심 단어만 엮어도 미국의 상징인 리퍼트 대사를 테러해 북이 원하는 대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종식시키고,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이 하나 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그의 이념지형이 드러난다.

그건 테러도 못 된다는 주장이 김기종을 좀 안다는 운동권 출신 의원들과 좌파 진영에서 나온다는 건 흥미롭다. 전대협 감투도 쓰지 못했고 민중문화 바닥에서도 아웃사이더였으니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개인적 돌출행동’이라는, 엘리트다운 지적이다. 한겨레신문 인터넷판은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 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행위’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소개하면서 “조직적 집단적 배후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현재(6일)로선 테러라고 규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적었다.

의도를 짐작 못하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종북몰이’ 같은 ‘이념 공세’를 통해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면서 보수층 결집을 꾀하는 게 아니냐는 게 그들이 우려하는 바다. 심지어 한 일간지는 “사건의 본질은 극단적인 외세 배격 성향을 가진 한 개인의 비이성적 돌출행동일 가능성이 크다”며 “섣부른 예단으로 남남갈등을 빚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라고 사설에서 주장했다.

어떤 예단도 하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테러와 일반 범죄의 차이가 무엇인가다. 한국테러학회 이만종 회장은 테러의 ‘동기’와 ‘표적’을 테러의 결정 요소라고 했다. 정치적 동기로, 무고한 시민을 표적 삼아 해당 정권의 특정 행동을 요구한 김기종의 행위는 아무리 우스워 보인대도 분명 테러다.

‘자존감 낮은 한 남자의 인정욕구와 과시욕구가 빚은 반사회적 폭력’이라고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깔아뭉갰지만, 개인적 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일반 범죄일 뿐이다. 조직적 배경이 없는 개인의 폭력이면 테러가 아니라는 것도 무식한 소리다. 올 초 덴마크에서 일어난 총격 테러처럼, 특정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이슬람국가(IS)의 인터넷 선전에 자극받아 비이성적 돌출행동을 자행하는 ‘외로운 늑대’가 늘어나는 게 세계적 추세다. 그런데도 미국이 테러 아닌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 테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봐야 한다. 테러로 규정하는 순간 미국은 보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김기종이 테러리스트에 대한 환상을 만족시키기는커녕 과거 눈빛 형형했던 운동권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마저 박살낸 것은 맥 빠지는 노릇이다. 무릇 테러를 할 짝이면 최소한 ‘거사’ 당일 칼날처럼 다림질한 백색 두루마기를 휘날리거나 정윤회 씨가 검찰 출두할 때 같은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으로 등장해야 했다. 그런데 김기종은 똥색 개량한복 차림에, 그것도 늘어진 목폴라를 받쳐 입음으로써 80학번의 이념에서 늙도록 헤어나지 못한 사회 부적응 루저임을 단번에 드러내고 말았다.

정치판 486의원들과 김기종이 다른 점이 있다면 수염과 개량한복일 것이다.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를 연상케 하는 그 수염과 주야장천 고수하는 그 복장은 꽉 막힌 민족주의, 교조적 주사파 성향, 죽어도 변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상징한다. 김기종이 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수사를 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일이다. 유럽에서 극단주의 테러의 토양이 이슬람이라면 우리나라에선 좌파 이념이 그 역할을 할 가능성도 크다.

김기종의 행색과 지위와 ‘똘기’가 테러리스트의 반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잡범으로 깎아내리는 건 또 다른 테러를 부를 우려가 있다. 운동권 정치인들의 적선(積善) 때문에 집회 현장마다 개량한복 차림의 늙은 루저들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의 유일한 업적이 ‘종북 척결’이기는 나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종 때문에 종북 테러 관련 수사와 ‘예방 조치’가 불가피해졌으니 대통령은 정말이지 운도 좋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김기종#격하#블랙코미디#한겨레#종북몰이#일반 범죄#외로운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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