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맞는 옷 고르듯, 같은 책도 내 맘에 드는 걸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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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출판계 ‘패션책’ 아이디어… 판형-표지 디자인 달리해 출간
독자 취향에 따라 선택하게… 어둠속서 빛을 내는 야광책까지

출판사 아티초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선집 ‘꿈속의 꿈’을 만들면서 S, M, L 같은 옷 사이즈처럼 책 판형 크기를 달리해 독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샤를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은 세 화가의 작품을 표지에 넣었다. 출판사 천년의상상은 표지에 야광물질을 발라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책을 만들었다(왼쪽부터). 각 출판사 제공
출판사 아티초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선집 ‘꿈속의 꿈’을 만들면서 S, M, L 같은 옷 사이즈처럼 책 판형 크기를 달리해 독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샤를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은 세 화가의 작품을 표지에 넣었다. 출판사 천년의상상은 표지에 야광물질을 발라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책을 만들었다(왼쪽부터). 각 출판사 제공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생각이에요. 어떤 색상을 좋아할까요.”

“외출할 때 클러치백을 주로 드는데 어떤 사이즈가 편할까요.”

옷이나 패션 소품을 파는 가게에 걸려온 전화가 아니다. 지난해 2월 문을 연 출판사 아티초크에 걸려온 독자 문의 내용이다. 이 출판사에서는 ‘책도 패션이다.’

같은 책도 옷처럼 사이즈(판형)와 색상(표지)을 달리해 독자가 자기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미술관 큐레이터 출신인 박헬렌 아티초크 대표는 다양한 색상과 사이즈로 옷을 만드는 제조유통일괄형(SPA) 패션 브랜드처럼 선택 폭을 넓혔다. 책엔 비닐커버를 씌워 새 옷 포장을 뜯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이 출판사는 최근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출간하면서 미국인 아트디렉터에게 의뢰해 세 가지 디자인의 표지로 내놓았다. 독자들이 구입할 때 카를로스 슈바베의 ‘파괴’, 구스타프 클림트의 ‘금붕어’, 로비스 코린트의 ‘순수’ 중에서 고를 수 있도록 한 것. 여성이 도전적으로 정면을 노려보거나, 수줍게 나신을 드러내고, 슬픈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각각의 표지 덕분에 같은 시집이면서 느낌이 다르다.

이 출판사가 지난해 출간한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선집 ‘꿈속의 꿈’ 역시 세 가지 판형으로 제작했다. 스마트폰 크기의 ‘포켓’(9cm×14.8cm), DVD 케이스 크기의 ‘레귤러’(11cm×18cm), 미니 태블릿PC 크기의 ‘라지’(12.5cm×20.5cm)다. 대학원생 김현빈 씨(29)는 “재킷 호주머니에 책을 넣고 다니며 읽으려고 포켓 사이즈를 산다. 책 디자인이 좋아 자연스럽게 멋 내기 소품도 된다”고 했다. 세 표지의 책을 모두 구입해 옷이나 핸드백에 따라 골라서 든다는 여성 독자도 있다.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띠지도 없애고, 얇은 종이를 사용해 책 무게도 같은 판형의 다른 책보다 40% 이상 줄였다. 판형에 따른 가격차는 600원이다.

클럽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야광봉, 야광팔찌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책도 나왔다. 출판사 천년의상상은 이달 책 제목과 같은 이름의 페이스북 인기 페이지를 책으로 옮긴 ‘열정에 기름붓기’를 출간하면서 표지에 야광물질을 입혔다. 책을 읽다가 불을 끄면 형광색 열기구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완규 천년의상상 대표는 “20대 저자들의 혁신적인 이야기를 책에 담은 만큼 책의 물성도 혁신적으로 만들었다”며 “젊은층이 책의 물성에 호기심을 느껴야 독서와의 거리도 좁힐 수 있다”고 말했다.

명품 브랜드처럼 수작업으로 제작한 책도 인기다. 디오브젝트 출판사는 표지 인쇄를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제작한다. 여러 가지 색을 겹쳐 찍으면 결과물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 세상에 단 한 권만 존재하는 효과를 낸다. 북디자이너 김주영 씨는 “옷을 살 때도 남과 다른 특이한 옷을 찾듯이 다른 책과 달라 보이는 특별한 책을 만들려는 시도가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독특한 ‘패션’을 자랑하는 책들은 판매에서도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티초크가 다양한 판형으로 낸 책들은 모두 초판 발행부수(1000∼3000부)가 다 팔렸고 추가 제작에 들어간 상태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불황#출판#패션책#악의 꽃#꿈속의 꿈#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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